기아자동차의 창립자인 고(故) 김철호 회장은 1922년, 불과 16세의 나이에 홀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철공소에 들어가 견습공으로 일하며 기술을 배운 그는 1930년 자전거 부품을 만드는 삼화제작소를 인수해 꾸려나가며 돈을 모았다. 이후 1944년 일본의 패전을 앞두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해 12월, 서울에 기아차의 뿌리인 경성정공을 설립한다.
자전거 부품을 만들던 경성정공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고, 1952년 1월 이름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초의 국산 완성 자전거인 삼천리호를 만들어냈다. 기아산업의 자전거 사업부는 이후 1979년 삼천리자전거로 분사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김철호 회장의 손자인 김석환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삼천리호가 성공을 거둔 이후 기아는 일본 혼다와의 제휴를 통해 1962년 국내 최초의 모터사이클 C-100을 생산하는 한편, 마쓰다와도 기술 제휴를 맺고 356cc 엔진을 탑재한 삼륜차 K-360을 생산하는 등 본격적인 자동차 회사로 도약하기 위한 전진을 거듭한다. 특히, 1967년 선보인 삼륜차 T-2000과 T-600이 대성공을 거두며 회사에 큰 이익을 안겨줬다.
자금과 기술을 축적한 기아는 1971년 4톤급 복사(Boxer), 2톤급 타이탄을 내놓으며 4륜 화물차까지 영역을 확대한다. 더불어 1973년에는 가솔린 엔진을 국내 최초로 생산한다. 그리고 1973년 6월, 경기도 소하리(현재 광명시 소하동)에 연간 2만5천대 생산능력을 갖춘 국내 첫 종합자동차 공장을 완공하며 승용차 양산을 위한 준비를 마친다.
기아의 첫 승용차 브리사는 1973년 8월 픽업 모델인 ‘B-1000’이 먼저 등장했고, 1974년 10월 세단 모델인 ‘S-1000’이 출시되었다. 브리사는 라틴어로 ‘산들바람’이라는 뜻이며, S는 소하리, 1000은 배기량을 의미한다. 가격은 159만8천500원.
브리사는 마쓰다 패밀리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첫 출시 당시 약 60%의 높은 국산화율을 달성했다. 985cc 가솔린 엔진에 4단 수동변속기가 조합됐으며 최고출력 62마력, 최대토크 8.1kg.m의 힘을 발휘했다. 최고시속은 140km. 더불어 경쟁자들 보다 작은 체구에 790kg의 가벼운 무게를 지녀 약 23km/L에 달하는 우수한 연비를 자랑했다.
이처럼 우수한 경제성을 바탕으로 ‘하루 2천원이면 유지할 수 있다’는 광고를 앞세운 브리사는 출시 초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택시 시장에서 인기가 대단했고, 1970년대 석유파동도 경제성을 앞세운 브리사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 본격 출고가 시작된 1975년에는 1만794대의 연간 판매량을 기록하며 약 58%의 점유율을 차지, 승용차 시장을 석권했다.
하지만 1976년 현대 포니가 등장하며 전세는 역전됐다. 이에 기아차는 포니에 대응하기 위해 1977년 1월 브리사 2를, 1978년 6월에는 페이스리프트 모델인 브리사 K-303을 선보였다. 가격은 각각 249만원, 264만5천원. 브리사 2와 브리사 K-303은 마쓰다 그랜드 패밀리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소형차로서는 높은 배기량이었던 1,272cc 가솔린 엔진을 탑재해 최고출력 87마력, 최대토크 11.0kg.m의 힘을 발휘했다. 더불어 이 엔진을 기존 브리사에도 장착했다.
그러나 브리사는 한국 첫 고유 모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현대 포니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고, 1981년 신군부의 자동차공업합리화 조치(2.28 조치)로 인해 현대와 새한은 승용차를, 기아는 중소형 상용차와 버스를 생산하도록 결정되어 브리사는 1981년 12월 단종에 이르렀다. 브리사 S-1000은 1974년~1981년 12월까지 총 7만5천987대가 생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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