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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올드카, 1981 기아 봉고



기아는 1974년 출시한 브리사의 성공으로 승용차 시장에 안착했지만 환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브리사는 현대 포니가 등장하며 고전했고, 이어진 2차 오일쇼크는 자동차 시장을 위축시키며 기아에게 시련을 안겨줬다. 그리고 1981년, 정부의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더 이상 승용차를 만들어 판매할 수 없게 되며 기아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대신 기아는 1톤 이상 5톤 미만의 트럭과 12~32인승 중소형 버스 생산을 담당하게 된다. 어쨌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기아는 1981년 8월, 원박스카 타입의 12인승 승합차 ‘봉고 코치’를 내놓으며 승부수를 던졌다.



봉고는 일본 마쯔다가 만든 동명의 차를 들여온 것으로 1980년 봉고 트럭 모델이 먼저 출시됐으며, 승합차에는 구분을 위해 봉고 코치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봉고 코치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소비자들에게 봉고는 곧 승합차를 의미하게 됐다.


봉고는 최고출력 70마력의 2,209cc 디젤 엔진을 장착했고, 최고시속은 115km까지 가능했다. 출시 당시 가격은 638만7천원. 초기에는 개인등록이 불가했기 때문에 지인의 회사에 위장등록해서 구매하는 경우도 많았다. 1982년 6월부터는 개인등록이 허가되며 더 많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기아는 봉고에 사운을 걸고 총력을 기울였다. 1982년에는 모든 사원들의 이름표 위에 봉고 상표를 부착하고 아침 인사를 “봉고를 팝시다”로 대신했을 정도. 결국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교회와 유치원, 병원 등의 단체나 기업을 중심으로 구매 붐이 일었고, 국민 소득 수준이 높아지며 레저 활동을 위해 봉고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아울러 다양한 수요에 맞춰 밴 모델도 내놓게 된다.


봉고 코치는 1981년 5개월 동안 1천77대가 판매됐으며, 이후 1982년 1만3천91대, 1983년 1만8천947대, 1984년에는 1만9천901대로 판매량이 급증했다. 1981년까지 누적 적자가 530억원에 달했던 기아는 봉고의 활약에 힘입어 1982년에 39억원 흑자로 전환됐다. 이른바 ‘봉고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후 1983년에는 9인승 모델 ‘봉고 나인’이 출시됐고, 1985년에는 90마력의 1.4리터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저가형 모델 ‘봉고 타운’이 라인업에 합류했다. 1986년에는 경쟁 모델인 현대 그레이스의 데뷔에 맞서 후속 모델로 ‘베스타’를 선보였다. 1987년에는 자회사인 아시아자동차를 통해 15인승 모델 ‘토픽’을 내놓기도 했다.



시장을 독점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덕분에 봉고는 승합차의 대명사로 불렸으며, 대중들에게 승합차=봉고차로 통했다.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일부 해제된 이후 현대에서 경쟁 차종인 ‘그레이스’를 내놨을 때도 사람들이 “현대에서 나온 봉고차”라고 말할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봉고는 1986년에 후속 모델인 베스타에게 바통을 넘겨줬고, 베스타는 다시 ‘프레지오’로 이어지며 기아 승합차의 계보를 이어갔다. 이후 2004년에는 프레지오의 부분변경 모델이 ‘봉고3 코치’라는 이름으로 출시되며 다시 부활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기아는 수요 변화와 강화되는 안전 및 환경규제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1년여 만에 봉고3 코치를 단종시켰고, 이로써 기아의 원박스카 명맥도 끊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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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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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d*******
초기에는 봉고 타고 가다가 사고로 일가족이
다죽었다 .
그래서 저승에서 다시 만났는데 할머니가 무어라
했겠 라는 장난을쳤지
정답은 봉고 덕에 다 모였네..
2020-07-21 17:08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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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
크.. 추억의 봉고군요~
2017-11-02 08:50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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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e*
학원차!
2017-10-30 09:30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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