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의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는 포드의 링컨 네비게이터에 대응하는 풀사이즈 럭셔리 SUV로,시보레 타호, GMC 유콘등과 플랫폼을 공유하는 형제차이다. 지난해 미국 슈퍼볼에서 MVP로 뽑힌 하인스 워드가 부상으로 받기도 했던 2007년형 에스컬레이드는 새로운 플랫폼에 업그레이드된 엔진과 변속기를 탑재하여 강력하면서도 효율적인 아메리칸 럭셔리 SUV로 거듭났다. 6.2리터의 배기량과 풀 사이즈의 거대한 차체를 지닌 3세대 에스컬레이드는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동급 경쟁 모델을 찾을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이다.
지난해 늦가을이었던 것 같다. 약속이 있어 쌀쌀한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시장골목에서 시커먼 덩치를 만났더랬다. 외신을 통해 본적이 있는 신형 캐딜락 에스컬레이드였다. 녀석은 까만색 차체에 우람하고 번쩍거리는 크롬 도금 휠을 끼우고 있어, 당장 미국 흑인 가수의 뮤직비디오에 나가도 될 법한 모양새였다. 잠깐 동안의 조우였지만 인상은 강렬했다. ‘저 따끈한 차를 벌써 수입해다가 타는 사람이 있구나…그것도 사제 휠까지 끼워서…’
2007년형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는 작년 11월말에 국내 출시 발표회를 가졌고,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그 크롬도금휠이 애프터마켓용이 아닌 순정 옵션 휠이었음을. 그리고 휠과 타이어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400만원의 추가 비용이 든다는 것도.
장소선택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던 용산전쟁기념관에서의 신차발표회에 이어 세 번째로 신형에스컬레이드를 만났다. 신형 구형을 통틀어 운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구형도 길에서나 몇 번 보았을 뿐 가까이할 기회는 없었고, 실은 관심도 없었다. 구형 에스컬레이드의 이미지는 미국땅에만 어울리는 기름 먹는 하마였음은 물론, 시보레나 GMC의 SUV를 큰돈 들이지 않고 치장해 내놓은 못생기고 엉성하고 비싸기만 한 형제차에 불과했다.
실제로, 1999년형으로 출시된 초대 에스컬레이드는 당시 GMT400 플랫폼을 쓴 GMC 유콘 디날리에 캐딜락 상표만 붙여 만든 급조된 럭셔리 SUV였다. 먼저 나온 링컨 네비게이터가 시장을 독식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부랴부랴 만들어낸 탓이었지만 결국 캐딜락 브랜드에 먹칠을 한 제품 중 하나가 되었다. 대신 디자인을 일신하고 2002년형으로 출시된 2세대 모델은 시보레, GMC의 형제차들과 플랫폼(GMT800)을 공유하되 사양에 차별을 두어 이미지 개선에 성공하였고, 특히 유명인사들과 튜너들로부터 인기를 얻어 최신 트렌드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다. 어쨌거나, 커다란 스피너휠을 빙글빙글 돌리며 뮤직 비디오계를 평정했다고 해서 그 어색한 얼굴과 무책임한 덩치를 용서해줄 수는 없는 일. CTS와는 달리 영화<매트릭스2>에 출연했다고 해서 나아질 이미지는 아니었다. (클라이막스에서 모피어스의 칼질에 나뒹굴던 쌍둥이의 차가 에스컬레이드의 SUT 버전인 EXT 모델이었다.)
에스컬레이드의 도발
사실 이전에 포드에서 수입한 링컨 에비에이터(내비게이터의 동생뻘)를 몇 번 타보면서 ‘이 정도 덩치와 배기량만 해도 국내 사정에는 어울리기 힘든 존재다’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GM코리아에서 그보다 한 등급 위인 구형 에스컬레이드를 들여왔을 때는 흠칫 놀랐었다. 하긴 닷지 바이퍼도 정식으로 들어왔던 마당에 어느 쪽이건 수요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수입사에서 선뜻 들여올 수 있는 정도인가 하는 말이다.
이에 대한 답이 바로 이번에 다시 한번 한국땅을 밟은 2007년형 에스컬레이드이다. 3세대 에스컬레이드는 새로운 GMT900 플랫폼을 쓰며, 변함없이 GMC 유콘과 시보레 타호등 여러 GM식구들을 형제차로 대동하고 있다. 다른 모델들과의 차별화에 대해서는 이제 일부러 체크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며, 2세대 모델까지만 해도 정도가 심각해 보였던 엉성한 만듦새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솔직히, 이제야 호감이 생긴다. 사진으로 보던 새 에스컬레이드는 은근히 귀여운 디자인이었다. 통통한 몸매와 모서리 진 얼굴이 은근히 잘 조화를 이루며, 덩치에 걸 맞는 시원시원한 선들이 돋보인다. 검은색 차체를 측면에서 가로지른 세 줄의 크롬액센트도 일품이다. 실물도 멀리서 보면 여전히 귀엽게 보인다. 단, 다른 차가 옆에 없이 혼자 서있을 때만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거나 다른 차와 비교해보면 그 크기에 주눅이 들기 시작한다.
에스컬레이드에 에스컬레이드(escalade) 하다
캐딜락의 특징들과 최신 패밀리룩으로 장식된 차체를 살핀 후 차에 올랐다. 사이드스텝을 밟고 훌쩍 올라타는 기분이 썩 괜찮다. 뭐라도 됀 기분이랄까. 사진으로 봤을 때 GM대우의 토스카를 연상시켰던 스티어링휠과 대시보드는 직접 보니 소재와 면 구성에 차이가 있어 인상이 딴판이다. 가령 이쪽의 알루미늄 장식들은 질감이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 9와 3만 표시되어 있는 직사각형 아날로그 시계가 재미있지만 그 예술적 감각이 이해는 되지 않는다. 실내마감은, 특히 눈에 쉽게 들어오는 가슴 윗부분은 얼핏 유럽차로 착각할만한 수준이다.
파킹 어시스트 및 전동접이 기능이 있는 아웃사이드 미러와 틸팅 헤드레스트, 스티어링 컬럼 좌측의 동전함등 기대하지 않았던 사양들도 눈에 띈다. 거울은 실내외 모두 ECM 기능을 채택하고 있고, 깜빡이 스위치는 차선 변경기능이 있어 편리하다. 필요하면 스티어링 휠도 덥혀주고, 앞유리 워셔액도 덥혀준다. 뿐인가, 헤드콘솔의 스위치로는 선루프 조작뿐 아니라 리어 게이트도 전동으로 여닫을 수 있고, 2열 시트도 원격으로 접어 버릴 수 있다. 두 개의 슬롯을 가진 보스(BOSE) 5.1 오디오 시스템은 DVD오디오와 비디오, 6CD 체인저, MP3, 돌비 디지털DTS를 지원하며 8인치 화면은 터치스크린 방식이다.
1열 시트는 이지엑세스와 메모리 기능이 내장되어 있으며, 등받이와 방석을 구분해 3단계로 히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쿨링까지 가능하다. 센터콘솔은 놀랍도록 넓은 크기(14리터)를 자랑하지만 그만큼 무게도 상당해서 뚜껑을 모두 열면 경첩부분이 위태위태해 보인다.
주차 브레이크는 족동식이고 릴리스 레버를 당겨 해제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 레버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어 자기 차가 아니라면 헤매기 쉽겠다. 풋레스트가 없지만 책상 의자식 자세로 무릎을 세워 앉기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을 듯. 페달 깊이가 전동으로 조절되는 대신에 스티어링 컬럼의 깊이조절기능은 생략되어 있다. 이 스티어링 컬럼에는 자동변속기의 시프트레버가 달려있는데, 재미있게도 여기에 수동변속모드를 위한 +/- 버튼이 붙어있다. 이를 조작하려면 한 손으로 아이 팔을 잡는 것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가 나온다. 실제로는 특정 단수에 변속기를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사용단수의 범위를 제한해 주는 ‘무늬만 수동’모드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역시 예상치 못했던 기능이다.
기대에 부합하는 주행성능
시동키를 돌리면 계기판의 파란 바늘 네 개가 일제히 양끝단을 왕복했다가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환영 세레모니를 펼친다. 실내에서는 눈치채기 어렵지만 이때 차 뒤편으로 나가보면 몇 초간 조용하게 컴프레서가 작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동 높이조절식 후륜서스펜션을 위한 장치다. 서스펜션은 주행중 차속, 휠 트레블, 리프트/다이브, 조향을 체크하여 4륜의 진폭수준을 실시간으로 독립조절해주는 기능도 갖고 있다.
엔진은 알루미늄 6.2리터 볼텍 V8으로, 푸시로드 방식이면서도 흡배기에 모두 가변밸브타이밍(VVT)을 적용한 독특한 구성이다. 보닛을 열어보면 생각보다 훨씬 작은 엔진이 커버도 없이 오도카니 들어앉아있다. 아이들링은 600rpm정도로, 불규칙한 배기음이 왠지 듣기에는 더 좋다. 회전계는 눈금이 6,000rpm까지 그려져 있고 별도의 레드라인은 표시하지 않고 있다. 403마력의 최고출력은 5,700rpm에서, 57.6kg.m의 최대토크는 4,400rpm에서 나온다.
시프트 레버를 아래로 잡아 내리고 무거운 덩치를 천천히 움직여 도로에 접어들었다. 평소 시야를 가리던 큰 차들이 이제 모두 눈 아래에 있다. ‘저 차가 원래 저렇게 작았나?’ 사물을 인식하는 새로운 기준이 생긴다. 속된말로, 웬만한 차는 모두 \'깨갱\'이다. 연예인들의 대형 밴도 이런 운전느낌이 아닐까 싶긴 한데, 치고 나가는 힘은 비할 바가 아니다. 이 덩치가 0-100km/h 가속을 6.8초에 끊는다. 차선을 바꾸며 뒤뚱뒤뚱 도로를 휘젓고 다니니 주위의 차들이 모두 얼어 붙는 듯 하다. 역지사지, 이만한 덩치의 시커먼 차가 휘청거리며 시야에 나타난다면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긴장을 늦출 수 없을 것 같다.
변속기는 하이드라 매틱(Hydra-Matic)이라 불리는 신형 6단 AT (6L80)로, 40/60의 토크배분을 갖는 상시 4륜구동 시스템에 동력을 전달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늬만 수동’ 모드가 있지만 조작 자세도 그렇고 차의 특성도 그렇고 자주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저 지그시 페달만 밟아주면 대충 알아서 잘 해줄 것이다. 다만, 킥다운 시에는 스킵시프트가 아니라 다운 시프트 동작이 두 번에 나뉘어 진행되기 때문에 반응이 더디다. 시프트레버 끝에는 견인모드 버튼도 달려있는데, 이를 작동시키면 불필요한 변속과 슬로틀 페달의 부하를 줄여주어 트레일러를 견인할 때나 무거운 짐을 실었을 때 유용하다.
풀가속을 해보면 5,300rpm을 기준으로 60km/h, 100km/h, 145km/h에서 변속이 이루어진다. 속도계는 220km/h까지 표시되어 있지만 180km/h에서 리미트가 걸렸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부담이 없다. 앞을 막는 공기를 밀쳐내며 손쉽게 나아간다. 공기저항계수는 0.363으로, 덩치를 생각하면 역시 의외다. 100km/h 항속시 회전수는 6단에 1,500rpm, 5단에 1,800rpm, 4단에 2,500rpm, 3단에 3,400rpm, 2단에 5,100rpm. 느긋하게 그냥 내버려두면 엔진회전수는 대개 1,500rpm~2,000rpm 사이를 유지하며 조용하고 부드러운 진동만을 전달한다. 대신 이 이상이 되면 상대적으로 소음과 진동이 크게 느껴져 훨씬 높은 회전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낮은 회전수로 고요하게 달리고 있으면 마냥 기름이 줄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게이지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방심하면 곤란하다. 연료탱크가 100리터에 가깝기 때문이다. 리터당 연비는 시가지에서 5.9km, 고속도로에서 8km 정도로, 그나마 각오했던 것 보다는 나은 편이다. 연료로는 리서치 옥탄가 96이상의 ‘최고급 휘발유’를 권장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도금된 연료주유구 덮개는 휘어진 캔 뚜껑을 보는 듯 하다.)
서스펜션은 승차감을 중시한 이 차의 성격으로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의 움직임을 보인 반면, 브레이크 성능은 그것보다 수준이 높아 급제동시에도 우아하기만 한 몸동작이 인상적이었다. 주행안정장치로는 전복 방지기능이 있는 스태빌리트랙(StabiliTrak)을 적용하고 있다. 시승차는 비대칭패턴인 한국타이어의 벤투스 ST 285/45 R22를 끼우고 있어 이채로웠다. 기본형 타이어는 265/65R18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22인치 휠 이하의 에스컬레이드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2/3열 공간
에스컬레이드는 왠만한 사장님 회장님 (그리고 사모님)들이 죄다 타고 다니는, 거기서 거기인 대형 세단들보다는 차라리 돋보이는 존재이다. 하지만 불미스럽게도 그들만큼 안락한 뒷좌석 공간은 제공하지 못한다. 2열 공간을 위해 천정과 센터 콘솔 뒤편에 송풍구를 마련하고 있고 개별적으로 온도조절과 열선 조작, AV조작이 가능하다. 파워소켓과 컵홀더도 갖추고 있고 천정 가운데에 8인치 파나소닉 모니터도 매립해놓았다. 편의장비는 수준급이란 얘긴데, 문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체감공간이다. 독립식으로 구성된 2개의 2열 시트는 등받이 각도만 조절될 뿐 앞뒤 슬라이딩이 되지 않는데, 앞좌석 등받이나 B필러와 가깝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넉넉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좌석 가운데로 통로는 확보되지만 별도의 수납공간도 찾을 수 없다.
2열 시트들은 C필러 안쪽에 위치한 스위치나 운전석 헤드콘솔의 스위치로 힘 안들이고 접어버릴 수 있다. 스위치를 누르고 있으면 1단계로 등받이가 접히고 2단계로 시트 뒤쪽 아래 부분의 걸쇠가 풀리면서 스프링의 힘으로 시트 전체가 앞쪽으로 젖혀진다. 대신 시트를 다시 바닥에 고정시키는 작업은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 수상한 기능이다. 그렇다면 혹시 2열 시트를 접거나 떼어 버리고 아예 벤치 시트인 3열에 앉아 가면 리무진 같은 기분을 낼 수 있는 것 아닐까? 천만의 말씀이다. 3열은 바닥과 쿠션 사이의 높이 차이가 크지 않아 무릎을 당겨 모으고 앉는 자세가 되며, 2열 시트가 없다 해도 바닥에 두터운 방석을 깔고 앉는 자세가 가능할 뿐이다. 위치상 승차감도 좋을 리 없다. 필요하다면, 그리고 보관할 공간이 있다면 2,3열시트를 모두 떼어 버릴 수 있기는 하다.
이래저래 따져보면 에스컬레이드의 상석은 운전석이나 조수석이 되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스컬레이드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에스컬레이드에는 EXT 버전 외에도 뒤쪽 길이를 늘린 ESV 버전이 존재하는데, 그 쪽의 사정은 어떨지 궁금하다.
에스컬레이드를 막지 못하다
3세대 에스컬레이드는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고, 결국 글쓴이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길에서 에스컬레이드를 만나면 인상을 쓰거나 짜증을 내는 대신 아낌없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줄 것이다. 다만, 가능하면 검정색 외에 다른 색을 좀 만나봤으면 좋겠다. 국내용 브로셔에도 색상이 여섯 가지나 되던데. 아, 초기 물량은 진작에 다 팔렸다는 소식이다.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주요제원
크기
전장×전폭×전고 : 5,140×2,010×1,925mm
휠 베이스 : 2,946mm
트레드 (앞/뒤) : 1,732/1,702mm
차량중량 : 2,610 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