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니로 소형차 시장을 장악한 현대자동차는 이후 대우 로얄을 타깃으로 삼고 중형차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이 다가오면서 귀빈 및 의전용 차량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고, 1987년에는 수입차 개방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라나다의 뒤를 이을 고급 승용차를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고급차 개발 경험이 없던 현대가 이를 독자적으로 만들어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기존 최상위 차종인 그라나다를 전수해준 포드와는 이별의 시간이 머지않은 상황. 따라서 현대는 또 다른 제휴 업체인 미쓰비시에게 손을 내민다. 마침 미쓰비시는 자사의 고급 세단인 '데보네어'의 풀 모델 체인지를 준비 중이었고, 현대와 함께 개발하면 개발비를 절감할 수 있었기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현대 내부에서 ‘L카 프로젝트’라 불린 고급 세단 개발은 그렇게 시작됐다. 디자인은 현대가, 그밖에 섀시 및 파워트레인 등은 미쓰비시가 담당했으며 1986년 울산 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했다. 후륜구동 방식이었던 대우 로얄과 대조적으로 전륜구동 방식을 채택했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전륜구동 차량의 장점이 소비자들에게 부각되고 있던 시기였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86년 4월에는 당시 교통부가 처음으로 실시한 2만km 도로주행 테스트의 첫 시험차로 선정되어 내구성을 인증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7월 23일, 현대는 전국 10개 영업소에서 새로운 고급 승용 세단을 공개하며 시판에 들어갔다. 이름은 '웅장', '장엄'을 뜻하는 '그랜저'로 지어졌다. 가격은 1천690만원으로 당시 아파트 한 채에 버금가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랜저는 미쓰비시의 갤랑 시그마 플랫폼을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출시 당시에는 최고출력 120마력, 최대토크 16.2kg.m의 1,997cc MPI 시리우스 엔진을 탑재하고 5단 수동변속기를 조합했다.

또한, 국산차 최초로 오토에어컨, 풀 플랫 시트, 전자식 시간 및 경고장치 시스템, 사륜 벤틸레이티드 디스크 브레이크 등이 적용됐으며, 그 외에도 크루즈 컨트롤, 파워 스티어링, 파워 윈도우, 전동식 미러, 헤드램프 워셔 등의 고급 사양들로 무장했다.

이후 1987년 6월에는 2,351cc 직렬 4기통 엔진과 4단 자동변속기가 조합된 그랜저 2.4 모델이 출시됐다. 가격은 2천550만원. 1989년 3월에는 미쓰비시의 2,972cc V6 엔진을 탑재하고 국산차 최초로 ECS 전자제어 서스펜션과 ABS 브레이크를 적용한 그랜저 3.0을 2천890만원에 출시했다.

현대 그랜저는 고가의 가격에도 큰 인기를 얻으며 순조롭게 팔려나갔다. 반면 미쓰비시 데보네어는 일본에서 토요타 크라운, 닛산 세드릭 등에 밀려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이에 미쓰비시는 2.0리터 슈퍼차저 엔진을 탑재한 고성능 버전과, 당시에는 벤츠 소속이 아니었던 AMG의 튜닝 모델을 내놓기도 했지만 판매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한편, 그랜저의 인기에 위기를 느낀 대우 로얄은 1989년 로얄 살롱을 고급화하고 3.0리터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한 임페리얼을 내놓으며 맞불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임페리얼은 부품 수급 문제로 생산에 차질을 빚었고, 잇따른 품질 문제에 발목을 잡혔다.

결국 국산 고급 세단 시장의 최강자 자리를 차지한 1세대 그랜는 1992년 9월, 역시 미쓰비시와 공동 개발한 2세대 ‘뉴 그랜저’에게 바통을 이어주고 물러났다. 1세대 그랜저는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총 9만2천571대가 판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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