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9세대로 진화한 어코드가 등장했다. 혼다의 대표적인 주력 차종으로 오랜 세월 명성을 떨쳐온 중형 패밀리세단. 전작인 8세대와 비교하면 당연히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된 상품성을 자랑한다. 신형 어코드의 특징은 뛰어난 완성도, 효율성 강화, 배기량에 따른 모델별 성격의 차별화로 요약된다. 딱히 단점을 찾기 힘든 탄탄한 기본기는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무기다.
7세대보다 확연하게 커졌던 8세대에 비해 9세대 어코드의 덩치는 오히려 살짝 작아진 수치를 담고 있다. 길이와 높이는 줄어들고 너비만 약간 늘어나서 시각적인 안정감 향상이 돋보인다. 그러면서도 실내공간은 넓어졌으니 신형다운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며 트렌드에도 잘 부합하는 셈이다. 공차중량이 가벼워진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엠블럼을 가리더라도 단번에 어코드임을 알아챌 수 있는 이유는 8세대의 강인했던 전면 디자인을 적당히 계승했기 때문이다. 유난히 눈에 띄는 부분은 동급에서 보기 힘든 LED 헤드램프. 사소할지 몰라도 은근히 격을 높여주는 아이템이다. 범퍼 하단 가운데 적당히 가미된 크롬 라인과 안개등 주변의 스포티한 디자인은 세련된 멋스러움을 선사한다.
측면은 도어손잡이와 맞물리는 강한 캐릭터라인으로 인해 날카롭고 웅장한 면모를 동시에 드러낸다. 휠은 2.4 모델에 17인치, 3.5 모델에 18인치가 장착되어 성격에 부합하는 차별화를 꽤했다. 전면 헤드램프와 비슷한 형상의 LED 리어램프가 들어간 뒷모습은 적당한 볼륨감과 함께 차분하고 우아한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반짝이는 머플러도 2.4와 3.5 모델 각각 싱글과 듀얼로 구분된다.
외관보다 한층 더 진화된 실내 인테리어는 굉장히 만족스럽다. 전반적으로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디자인과 향상된 질감이 역시 신형임을 깨닫게 해준다. 촌스럽지 않은 우드트림과 메탈트림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단계별로 잘 정리된 센터페시아는 안정감을 더한다. 넓고 안락한 운전석 시트는 3.5 모델의 경우 2인분의 메모리까지 적용되어 패밀리세단으로서의 실용성을 더했다.
고맙게도 아이나비 내비게이션이 기본으로 장착된 큼직한 상단 모니터 아래엔 각종 조작이 터치로 가능한 패널이 달려있다. 기어변속레버는 구형보다 훨씬 세련된 모습. 개인적으로 주차브레이크는 일반적인 레버 방식을 가장 선호하기 때문에 반가웠다. 발로 조작하는 풋 브레이크는 불편하다는 평이 많아서 줄어드는 추세이며, 전자식은 실제 작동시간이 길어서 성질 급한 사람에겐 그 짧은 시간도 거슬린다. 굳이 단가를 높여가며 대중적인 패밀리세단에 장착할 이유는 없다.
신형 어코드에서 주목할 만한 장비는 레인 와치라 불리는 사각지대 모니터링 시스템. 우측 사이드미러에 카메라가 장착되어 사각지대를 아예 큼직한 화면으로 직접 보여준다. 방향지시등이 깜박이는 동안 자동으로 작동하며 따로 버튼을 눌러 계속 볼 수도 있다. 볼보의 사각지대 감지장치인 블리스나 여타 차종의 비슷한 장비들은 이따금 오작동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어코드의 시스템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면서 방향지시등을 넣고 우회전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적응이 필요하다.
넉넉한 뒷좌석 공간은 어코드의 장기 중 하나. 체감상 구형과 큰 차이는 없지만 무릎과 머리 공간이 더 향상되었다고 한다. 덩치 큰 성인 3명이 앉아도 불편하지 않고 장거리 여행도 충분하다. 폭스바겐 파사트처럼 뒷좌석 송풍구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기우에 불과하며 열선시트도 마련된다. 6:4는 아니지만 가운데가 큼직하게 폴딩되는 시트와 넓은 트렁크 공간도 빼놓을 수 없다. 어코드는 여러모로 패밀리 세단 또는 비즈니스 세단으로서의 목적에 부합하는 풍부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다음은 파워트레인과 주행성능으로 넘어가보자. 주로 시승한 차량은 V6 3.5리터 i-VTEC 엔진에 6단 자동변속기가 맞물리는 3.5 EX-L 모델. 이 엔진은 기존보다 개선되어 출력이 약간 상승하고 무게가 줄었으며 효율성이 높아졌다. 최고출력 282마력과 최대토크 34.8kg.m의 넉넉한 힘을 발휘하고, 연비는 기존에 구연비 기준 9.8km/l였던데 비해 신형은 신연비 기준 10.5km/l로 쏠쏠한 향상을 이뤄냈다. 가변 실린더 기술인 VCM은 여전히 효율성에 한 몫 단단히 기여한다.
D모드로 찬찬히 달리면 넉넉한 힘과 부드러운 감각이 전해진다. 2리터급 엔진이 부러워하는 자연스러운 여유로움. 속도를 높여나가면 매끄럽게 뻗어나가는 맛이 꽤나 인상적이다. 다소 의외다 싶을 정도로 뛰어난 부분은 고속에서의 안정감. 최근 일정상 독일차들에 주로 길들여졌던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기존보다 강성이 높아진 탄탄한 섀시를 비롯해 눈에 보이지 않는 훌륭한 기본기가 엿보이는 부분.
정숙성도 만족스럽다. 거슬리는 부밍음이나 각종 소음을 그와 반대되는 음파로 걸러내서 조용한 실내를 만들어주는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과 액티브 사운드 시스템이 적용됐기 때문. 상대적으로 고속에서의 풍절음은 거슬리는 편이다.
변속기를 S모드로 내리면 확연히 달라지는 반응이 차체를 휘감는다. 가속페달을 짓누르자 높아지는 회전수와 함께 적당히 그르렁거리는 엔진음과 배기음이 기분 좋은 음색으로 나지막하게 깔리며 오른발을 부추긴다. 감속하는 순간에는 알아서 저단으로 내려가 브레이킹을 보조하며 차체를 잡아주기 때문에 시종일관 스포티한 주행을 즐길 수 있다. 체감상으론 300마력 이상의 스포츠세단이 부럽지 않다.
스티어링 특성은 진중하고 솔직한 감각이다. 패밀리세단으로서는 스포티한 범주에 속하는 편. 날카롭고 예리하진 않아도 가볍거나 촐랑대지 않아서 믿음이 간다. 하체는 노면을 잘 걸러내면서 적당히 단단한 맛이 일품이다. 전륜 서스펜션이 더블 위시본에서 맥퍼슨 스트럿으로 변경된 점은 걱정할 필요 없겠다. 구형보다 세련된 반응이 세팅의 우수성을 입증하며 혼다의 선택에 믿음을 준다.
다음은 잠시 시승해본 2.4 EX-L 모델에 대해 짚고 넘어가본다. 188마력을 발휘하는 새로운 4기통 2.4리터 엔진이 기존과 다르게 무단변속기인 CVT와 조화를 이룬다. 효율성을 강조한 파워트레인으로서 전반적인 주행감각은 3.5 모델 대비 훨씬 부드러운 성격이며 신 연비기준 12.5km/L라는 흐뭇한 연비를 자랑한다.
3.5 모델이 묵직한 감각으로 스포티한 주행을 이끌어낸다면 2.4 모델은 그에 비해 다소 가벼운 편이라 느긋한 주행이 어울린다. 물론 일부 국산 중형세단들의 기본기 부족한 불안한 감각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결론적으로 3.5 모델은 패밀리세단을 구입하면서도 스포츠세단을 갈망하는 남성 운전자들에게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으며, 여성 운전자들에겐 밸런스가 잘 잡힌 2.4 모델이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겠다.
에필로그 혼다 어코드의 시작은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6년이란 세월동안 진화를 거듭하며 베스트셀링 세단의 자리를 이어가고 있는 오랜 역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으로 작용한다. 특히 9세대 어코드는 해외에서 출시와 동시에 시장 반응과 전문가들의 평가 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는 최근 독일차들의 강세로 인해 첫 출시였던 7세대 어코드 당시와 비교해 수입차 시장에서 혼다의 입지가 다소 줄어든 상황이긴 하지만, 9세대 어코드는 여러모로 뛰어난 완성도를 지녔기 때문에 중형 패밀리세단이라는 치열한 격전지에서 승리를 거둘만한 경쟁력 자체는 충분하다.
직접적인 경쟁자인 토요타 캠리는 부드러운 성격, 닛산 알티마는 스포티한 성격이다. 혼다 어코드는 2.4 모델과 3.5 모델이 두 가지 성격 모두를 아우르는 이상적인 라인업으로 등장했으며, 기술의 혼다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