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벤틀리 최초의 SUV 벤테이가를 시승하기 위해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로 향하는 길에서 문득 떠오른 속담이다. 3억원을 훌쩍 넘어서는 럭셔리 SUV를 타고 서킷을 달리는 것은 분명 흔치 않은 경험이기에, 약간은 부담감을 갖고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보이는 벤테이가를 마주했다.
전장 5미터가 넘는 이 대형 SUV는 우아한 라인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비율을 자랑한다. 거대한 전면 그릴과 원형 헤드램프를 통해 멀리서부터 명문가 벤틀리 소속임을 분명히 밝히고, 가까이 다가서면 양각과 음각이 두드러진 웅장한 풍채에서 당당함이 느껴진다.
실내로 들어서면 전반적인 디자인은 기존의 벤틀리 차종들과 흡사하다. 물론 평범한 양산차들이 절대 범접할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겨난다. 모기에 물린 흔적이 없는 추운 지역의 소가죽과 최상급 나무가 사용된 가죽+우드 인테리어는 장인의 손길을 거쳐 전통의 럭셔리 브랜드다운 품질로 마무리된다.
2+2 구조의 시트 배열에서 엿볼 수 있듯, 뒷좌석은 VIP를 의전해도 손색없는 독립된 전동식 시트로 구성됐다. 트렁크 공간은 넉넉하지만 일반적인 SUV들처럼 2열 시트를 접는 기능은 없다. 차의 성격에 맞게 짐을 싣는 공간보다 뒷좌석 탑승자를 더 배려한 셈이다.
벤테이가의 심장은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6.0리터 12기통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 8단 자동변속기와 맞물려 최고출력 608마력, 최대토크 91.8kg.m를 뿜어낸다. 0-100km/h 가속 시간은 4.1초, 최고속도는 301km/h에 달한다. 람보르기니 우루스의 등장으로 순위가 밀리긴 했지만, 당분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SUV TOP5 안에는 벤테이가의 이름이 올라있을 것이다.
슈퍼 SUV라 불러도 손색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벤테이가. 하지만 무게중심이 높은 SUV의 태생적인 한계를 감안하면 굽이진 코너가 많은 서킷을 달린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로 느껴졌다. 그에 대해 벤틀리 관계자는 모터스포츠 역사와 유전자가 벤테이가에 녹아들어있기 때문에 서킷에서도 만족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주행을 시작하자 12기통 엔진음과 배기음이 영국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웅장한 음색으로 실내를 감싼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짓누르자 목이 뒤로 젖혀지면서 무섭도록 빠르게 돌진해 나간다. 그러나 코너를 맞닥뜨리자 차체가 쏠리면서 주춤거리는 거동을 보인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시나리오 그대로다.
반전을 모색하기 위해 주행 모드를 스포츠 모드로 전환하자 그 즉시 모든 반응이 날카로워진다. 더 높은 엔진 회전수를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좌우 쏠림이 줄어들면서 네 바퀴가 노면을 더 강하게 움켜쥔다. 이후 나타난 코너부터는 완벽한 반전 시나리오를 써내려간 벤테이가. 같은 서킷에서 시승했던 나름 잘 달린다는 몇몇 세단들보다 훌륭한 운동성능을 보여줬다.
대형 SUV임에도 불구하고 세단 못지않은 몸놀림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벤틀리가 벤테이가를 통해 세계 최초로 선보인 전동 액티브 롤링 제어 기술인 ‘벤틀리 다이나믹 라이드’ 시스템 덕분이다. 운전 상황과 주행 모드에 따라 전기모터가 안티롤바의 비틀림을 제어하기 때문에 굽이진 코너에서도 롤링을 억제하며 그립을 최대한 유지한다. 여기에 언제든 긴박하게 멈출 준비를 마친 대용량 브레이크 시스템이 발군의 주행능력에 날개를 달아준다.
벤틀리는 시장 확대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얻어낼 목적으로 SUV를 만들었다. 물론 SUV를 원하는 벤틀리 고객들의 요구도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벤테이가를 보고 만지고 느껴본 결과, 벤틀리가 이 차에 온갖 정성을 쏟아 부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판매 가격은 3억 4,900만원부터. 원하는 옵션을 추가하면 액수가 늘어날 것이다. 가격을 다시 확인하고 나니 복잡한 심정이 밀려든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오르지 못할 나무라 해도 쳐다볼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진입장벽이 낮은 벤테이가 V8 모델을 선보인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 시대 궁극의 SUV 벤테이가는 인생의 목표마저 상향조정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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